/백설공주와 못된 왕비 그리고 일곱 난쟁이가 사는 세상

백설공주와 못된 왕비 그리고 일곱 난쟁이가 사는 세상

사람들은 늘 평등을 외친다. 하지만 세상은 늘 평등하지 못하다. 우리가 숨쉬며 살고 있는 대기는 78%이상을 차지하는 질소와 20%의 산소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많은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높이를 자랑하는 건축물들도 몇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을뿐이다. 인터넷은 분산된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만들어 졌지만, 자연스럽게 허브사이트라는 리더를 만들어 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도 자신이 원하던 아니던 리더가 존재한다.

사실 기준이 없다면 세상은 매우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또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어느 한 시점에서는 무엇인가 하나를 고정시켜 그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늘 리더를 만들어 내고 세상은 다시 그 리더라 불리는 허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정치나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만 리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스타를 만들어 내고 시대의 영웅을 탄생시킨다. 간혹 그런 리더들이 자신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에 빠지는 위험이 있기도 하지만, 세상은 평등이라는 가치의 일부 포기하고 늘 리더를 요구한다. ‘백설공주’의 동화에만 난쟁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상에도 늘 수많은 난쟁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백설공주와 또 다른 주연인 못된 왕비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국제통화: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세계경제

우리는 다른 거시경제학 서적들과는 달리 세계를 하나로 바라보는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이 세계에 한 종류의 돈만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른 돈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쉽게 오늘의 모습을 상상하겠지만,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안정적인 국제통화가 없었다면, 국가간에 거래는 단순한 물물교환수준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각국의 화폐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나라가 귀하게 여기는 금이나 은이라는 것이 있었다. 금화나 은화를 가지면 어느나라에 가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면 과거 네덜란드의 길더화처럼 언제나 금으로 바꿔준다는 믿을만한 증서를 가지고 나서야 한다. 실제로 1930년대초까지만 해도 모든 나라의 통화는 금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일종에 금에 고정시킨 고정환율제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31년 9월 20일 영국은 더이상 금을 영국 파운드화와 교환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그 18 개월 후인 1933년 4월 19일 미국도 금본위제를 폐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나라의 돈을 믿고 거래를 할 수 있을까? 오늘날에는 금대신 기축통화라는 것이 있다. 기축통화가 과거 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달러에 환율을 고정시킨 적이 있었다. 고정환율제도란 결국 달러의 가치와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돈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돈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승리를 예감한 승전국들이 미국의 브레이튼 우즈의 마운트 워싱톤 호텔에 모여 경제재건에 필요한 세계금융제도 구축을 위한 모임을 가지게 된다. 국제통화금융질서에 대한 이 회의에는 44개국 대표가 참여했지만, 실상은 영국과 미국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 협상이었다. 누가 백설공주고 누가 못된 왕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는 리더를 필요로 했다.

<Source: https://www.federalreservehistory.org/essays/bretton-woods-created>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물론 전후의 부흥에도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영국의 파운드화가 누려왔던 전통적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영국은 당시 최고의 경제학자 케인즈를 대표로 내보냈다. 반면 이미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며 생산과 무역의 측면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게 된 미국은 스스로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학문적 명성으로야 케인즈를 따라갈 수 없었지만, 경제적 영향력으로는 미국이 압도적이었다. 미국은 전쟁중에 이미 유럽에 100억달러 이상 유무상 형태로 달러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금 보유량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였기 때문이다. 결국 1 온스의 금과 미국의 35달러를 고정시키고 다른 통화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데 합의를 하게 된다. 이 말은 언제든지 35달러를 가지고 오면 미국의 중앙은행이 금 1 온스로 바꾸어 주겠다는 이야기다. 과거 네덜란드가 금으로 바꾸어 주겠다며 발행한 민간은행 암스테르담의 시대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달러를 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이미 미국인에게는 사라졌지만 다른나라 사람들은 금 1온스 당 35달러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른 통화는 미국의 달러에 고정되는 통화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늘 평등을 외치지만, 이처럼 세상은 늘 기준을 필요로하고 리더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리더를 통해 세계가 원할한 국제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리더가 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면서 수출이 늘어나는 반면, 미국은 1956년 스웨즈 운하로 인한 전쟁, 1960년 베트남전쟁 등으로 미국의 달러가 계속해서 세계로 빠져 나가는 현상이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미국의 금보유량이 1945년의 절반정도라는 소문이 돌았다. 프랑스의 드골 등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은 미국에게 갖고있는 달라 줄 테니 금으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더구나 1온스 당 35달러로의 교환은 인플레가 지속되면서 미국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국제 시장에서 금값이 지속적으로 오르자 온스 당 35달러를 주고 미국 정부로부터 금을 받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금 보유량이 자꾸 줄어들었다.    

1971년 8월 15일, 참다못한 리처드 닉슨 당시 미 대통령은 “더 이상 금을 사들이지도 팔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금과 화폐는 그로부터 관계가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세계 각국은 다시 다양한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한때 특별인출권이라는 의미의 SDR(special drawing rights)이라는 국제통화가 제안되기도 하였지만, 1971년 12월 미국 워싱톤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서 금값과는 관계없으나 금 1 온스당 미국 38달러로 하고 결국 미국의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통화는 미국과 하루 변동 폭 2.25%내에서 일대일 변동환율로 하는데 동의하였다.

2년간의 혼란과정을 거치며 1973년 미국이 고정환율제도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미국은 이제 금의 족쇄에서 풀려나 달러화를 찍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달러가 해외로 나간다는 것은 부채가 늘어남을 의미한다. 언제가는 달러를 가진 외국인들이 미국의 물건이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달러공급은 계속되었다. 결국 달러는 계속해서 신뢰를 잃게 되어 그 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졌다. 1980년 1월 금 가격은 1온스당 850불 까지 상승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1980년 미국의 40대 대통령이 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역사에 없던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라는 기록적인 쌍둥이 적자를 경험하게 된다. 레이건 정권의 고금리 정책으로 미국으로 달러가 다시 유입되면서 달러의 가치가 올라갔고, 미국의 수출경쟁력은 더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놀란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의 가치를 타락시키려 하였다.  

<Source: https://en.wikipedia.org/wiki/Plaza_Accord>

실제로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당시 가장 큰 무역흑자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엔화가 급등하고 수출이 감소하자, 일본은 국내 금리를 내리고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 일본 기업들은 엔화의 강세를 이용해 일본의 공장을 아시아 각국으로 이전 시키는 등 아시아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반사적 이익을 본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나라들이었다. 일본자금의 유입과 달러에 고정된 자국 환율덕에 일본이 고전하고 있는 수출시장에 진입하면서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하였다.

1986년 한국 역시 역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할 때도 바로 이 때다. 1960년부터 한국은 수출위주의 정책을 폈지만, 실제로 무역흑자를 경험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저달러로 인한 엔화의 강세, 때맞추어 형성된 저유가, 국제적인 저금리라는 ‘3저 현상’이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했고, 개항 이래 처음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처럼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서 상호영향을 주면서 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