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과 채권은 투자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의 가치를 미래를 위해 저장하거나 증식시키는 수단이며, 주식과 채권은 투자자와 기업간의 계약을 증권화한 것이다. 하지만 투자자가 필요에 따라 팔 수 있다면 더 많은 유동성을 확보하는 셈이다.
증권거래소는 투자자들에게 그런 유동성을 제공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거래소의 또 하나 중요한 기능은 기업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기업의 건전성과 실적에 대한 정보를 다양한 루트를 통해 얻은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기업가치를 결정한다. 한 기업의 경영자가 잘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면, 많은 사람들이 팔아버리기 때문에 주가는 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투자자들이 기업을 감시한다. 투자자들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셈이다.
황금을 향한 욕심으로 서쪽으로 떠난 콜롬버스의 항해시대로부터 상인의 시대로 연결되는 통로에서 금융의 발전이 한 몫을 하게 된다, 금융제도가 먼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네덜란드다. 해상무역의 경쟁에 비교적 늦게 뛰어든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를 주식회사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 주식을 사고팔기 위해 1609년 암스테르담에 최초의 주식거래소가 등장했고 자금을 융통하기 위한 은행이 최초로 개설되었다. 이 주식거래소에서는 동인도회사의 주식뿐 아니라 각국의 국채가 거래되었고 이 시장에 네덜란드의 정부와 상류층 그리고 그들의 하녀, 그리고 외국의 귀족까지 모여들었다.
증권거래소와 은행은 자본이 필요한 사람과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한자리에서 만나게 해 주었다. 이제 여러 명의 투자자가 위험을 나누고 큰 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크고 더 위험한 사업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앞서가는 네덜란드의 금융제도가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경쟁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오늘 날 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의 옛 이름이 네덜란드인들이 자리잡은 뉴암스테르담이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의 경제패권이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금융산업의 중심지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금융시장 발전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흥미롭게도 금융산업 자체는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1602년쯤 처음 문을 열기시작한 커피하우스는 곧 비즈니스 장소와 정보 교환소가 되었다. 온갖 사람이 모여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돈도 함께 몰렸다. 커피하우스의 칠판서비스로 시작된 정보지가 이후 로이드라는 국제금융회사로 발전하게 된다. 역시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1773년쯤 시작된 비공식 증권거래소가 1801년 런던에 증권 거래를 위한 신축건물이 완성되면서 런던증권거래소가 정식으로 탄생하였다. 이 후 영국의 런던이 세계 금융산업의 중심 역할을 수행해 왔다.
세계 1차 대전 후 미국 경제가 크게 번영하면서 미국은 영국과 금융산업에서 경쟁하다가 세계 제 2차 대전 후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를 지배하면서 월스트리트가 세계 금융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의 제조업이 아시아의 신흥개발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자 미국은 금융산업을 새로운 국가 성장동력으로 키워내기 시작한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금융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각종 파생상품과 헤지펀드가 등장하여 증시가 호황을 이루면서 미국의 투자은행 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발전한 금융시장에 실물경제와 멀어진 상품이 등장하고, 거래를 위한 거래를 조장하는 제도가 나타나면서 도박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은 기업의 미래수익을 오늘 미리 실현하려는 탐욕을 자극했고, 그 과욕은 거품을 탄생시켰다. 1987년의 미국의 블랙 먼데이와 1990년의 나스닥 거품 붕괴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주식시장은 기업의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 개인들을 중산층으로, 그리고 그들이 저축한 돈으로 기업도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증권시장은 기업과 관련이 없는 파생금융상품이 거래되고 있으며, 공매도와 신용거래가 도입되어 투자가 아니라 돈놓고 돈먹기식의 도박장이 되고 말았다. 저축이나 투자의 목적을 가진 개인들이 드나들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상승과 하락에 배팅을 하고, 한 몫 잡는 사람과 재산을 탕진하는 사람으로 갈라내는 제로섬 게임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투기나 도박의 요소가 생긴 것이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거품이란 불확실한 곳에서는 늘 태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에 생겨난 거품의 대표적인 사례 역시 금융이 발전하던 네덜란드에서 발생한다. 1604 년에 동인도회사의 첫 배가 닻을 올렸을 때 주가는 1602년 발행 때보다 30%이상 올라갔다. 배가 침몰했다거나 해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 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기도 했지만, 경기가 한참 좋을 때는 주가가 열 배로 뛰기도 했다.
주식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한 네덜란드 사람들은 다른 물건에서도 가격변동의 차이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했다. 그 중에 하나가 튤립 뿌리이다. 터키에서는 수입된 이 꽃을 유럽인들은 귀한 꽃으로 여겨 앞다투어 정원에 심었다. 튤립은 점점 부의 상징이 되었고, 튤립의 수요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튤립에 대한 수요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 발 빠른 상인들은 이듬해 수확할 튤립의 알뿌리를 미리 사기 시작했다. 선물거래가 이루어 진 것이다. 이를 돈벌이로 인식한 상류층과 그들의 하녀까지도 이 선물거래에 돈을 투자하였다
전 국민과 외국인까지 튤립 투기에 뛰어들자, 암스테르담의 증권거래소는 튤립을 거래소에 상장시켰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채권에 등급이 매겨지듯이 튤립에도 등급이 매겨졌다. 위험에 대한 등급이 아니라 수익에 대한 등급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튤립의 뿌리는 이제 황제튤립이나 제독튤립이니 하는 등급이 생겨났다. 하지만 튤립의 뿌리에서 튤립이 피어날 때까지는 그 튤립이 어떤 색상을 지닐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누군가의 조작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왜냐하면 20세기 이후에 밝혀진 것이기는 하지만 튤립의 색상은 바이러스의 감염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튤립 뿌리에서 황제튤립이 피어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튤립뿌리 하나가 대저택의 가격과 맞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불활실성은 튤립 가격에 상상할 수 없는 거품을 만들어 내었다. 더구나 주식과 달리 튤립 뿌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다. 귀족이나 상인뿐만 아니라 농부와 하녀들까지 모두 투기 열품에 휩싸였다. 이런 튤립 열풍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637년 어느 날, 몇몇 사람들이 생각처럼 높은 값에 튤립 뿌리를 팔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언제까지 오를지 모를 불안감 속에서 오를 대로 오는 튤립 알뿌리의 가격이 한 번 꺾이자 공황심리가 시장을 지배해 이튼날 부터 연일 폭락세를 기록하며 불과 4개월 사이에 95~99%나 빠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튤립 뿌리가 정원에 심는 용도 말고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유럽의 금융산업 성장으로 넘쳐나는 자금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갔다. 1624년 네덜란드인이 인디언으로부터 사들인 맨해튼 섬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다시 미국의 땅이 되었다. 이 곳에 모여든 무역상과 금융업자들은 그 곳을 월스트리트라고 불렀다. 세계 최대의 허가받은 도박장이 시작된 것이다.
주식에 투자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오늘의 소비를 줄여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업에 입장에서 보면 부채다. 그런데 개인투자자들이 부채를 얻어 부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공매도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주식을 팔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니 결국 주식을 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빌린 주식으로 주가하락에 베팅을 하는 것이 공매도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투자라고 할 수 없다. 실물경제에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이 돈을 가지고 하는 게임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금융시장이 실물경제에서 멀어지면서 거품이 생기고 또 위기를 만들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