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와 공급이 만나 경기순환을 이루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 경기순환을 이루다

지구촌 경제는 1700년대 중반이후 지속적으로 성장을 해왔지만, 끊임없이 경기의 상승과 하락이라는 순환적 변동을 반복해 왔다. 이같이 경기가 변하는 것을 ‘경기순환(Business Cycle)’이라고 한다. 여기서 경기변동이 아닌 경기순환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만들어져 250년 이상 흐르는 동안 경제활동의 상승과 하강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선 기후변화나 전쟁과 재해 그리고 기술변화 등과 같은 충격이 경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불규칙한 것임으로 주기적인 순환을 만들어 낸다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학자들마다 경기순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답은 아직 모르거나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경기순환을 자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관점, 과잉투자로부터 발생한다고 보는 이론, 소비의 감소가 요인이라고 보는 학설 그리고 기술혁신이 경기를 변동시킨다는 이론 등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source:https://en.wikipedia.org/wiki/File:Economic_cycle.svg>

모든 것이 시간이 필요하고 원인과 결과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경기가 순환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연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씨를 뿌려 싹이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세월이 흘러야 한다. 그리고 시들어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가듯 개인이나 기업과 국가도 모두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많은 경우 지나침 때문에 순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력의 지나침, 부의 지나침, 탐욕의 지나침이 역사의 순환, 경제의 순환, 주식시장의 순환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 시작이 무엇이 되었던 경제도 파급효과에 의한 순환의 고리를 가지는 시스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변수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경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아침 출근 길에 나를 배려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평소보다 더 웃는 얼굴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나의 인사가 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줄 수 있다. 그 기쁨은 다시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파급된다. 선순환이 걸린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누군가 무례한 일을 당한다. 그리고 기분이 아주 안좋아져서 찡그린 얼굴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무시하는 행동을 취한다. 이제 악순환이 걸리게 될지도 모른다.

경제가 성장하는 단계에서는 당연히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증가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깨지고, 경제는 후퇴 또는 침체하는 현상을 보여 왔다. 공급은 느는데 소비가 다 안되거나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충분히 안되는 것이다. 경기가 순환하는 이유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있는 것은 불완전한 정보로 인한 또는 가격 경직성과 같은 비효율성으로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시장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수요가 만들어진다. 인터넷의 발전은 수많은 새로운 장비와 소프트웨어 시장을 만들어 냈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경기는 상승하고 공급에서의 경쟁도 치열해 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장도 얼마후 성숙기에 이르고 생산기술 역시 절정에 다다르면서 생산설비는 이미 차고 넘치게 된다. 여기에 기업마다 재고가 쌓이기 시작하면 생산을 줄이지 않을 수 없고 인력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결국 경기는 하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이J. B. Say는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를 흔히 ‘세이의 법칙(Say’s law)’이라고 부른다. 아담 스미스나 세이 모두 경제학의 고전을 만든 사람인 만큼 고전학파로 불리는 사람들이며,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이 고전학파의 세이가 생산, 즉 공급만 잘 관리하면 수요, 즉 구매할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생산만 늘리면 자동으로 모두 소비되는 것일까?

한 마디로 생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형태이던 소득이 생기기 때문이다. 100명이 사는 열방이라는 마을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곳에는 3개의 기업이 있다. 거기서 일하는 40명의 월급쟁이 그리고 그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 그리고 주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 모두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낸다. 그렇게 소득이 생긴 생산자는 이제 그 돈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 변신한다. 마을 전체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질량불변의 법칙이 작동되는 것이다. 열방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한 해의 생산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국민총생산이다. 이 생산을 하기위해 기여한 모두에게 임금, 이자, 배당 등의 명목으로 분배하게 될 것이며, 마을 사람들은 그 소득으로 소비하고 남은 것은 저축하게 될 것이다. 저축은 다시 다음 해 생산에 투입되어 이자나 배당금이라는 소득을 만들어 낼 것이다. 따라서 저축도 지출의 일부라고 한다면 이 마을에서 생산, 분배 그리고 지출되는 액수는 늘 같게 되어 있다.  

결국 공급과 수요가 일치한다는 말이 된다. 팔리지 않은 물건 즉 재고가 없다면 그렇다. 우선 그렇게 생각해 두자. 재고라는 것이 특별히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면 생산된 것이 판매되지 않아서 기업들이 휴업하고, 실업이 발생하는 사태는 있을 수 없다. 총공급의 크기가 총수요의 크기를 결정하고 총공급과 총수요는 언제나 일치하므로 항상 완전고용이 달성된다. 환상적인 경제인 셈이다.

고전학파의 경제학자들도 어떤 상품의 일시적 과잉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일시적 과잉은 시장이 균형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떤 가격은 너무 높고 어떤 가격은 너무 낮다는 이야기다. 이 경우에 가격이 높은 상품에 대해서는 재고가 남아 있고 낮은 가격의 상품에는 잠재 수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가격의 기능으로 정확히 상쇄되어 불균형은 사라지고 만다. .

즉 물건이 안팔리면 가격이 내려가서 소비자들이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공급과잉은 고전경제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곧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 손 즉 가격의 조정으로 모두 소비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세이의 법칙에 따르면 국민소득의 결정에 있어 공급측면만 영향을 미치고, 수요측면은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정부는 공급 사이드만 신경 쓰면 된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급자 시장이 존재하였던 적이 있다. 무엇이든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시절이다. 일부 실패한 기업가도 있었지만,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기업이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다.

이런 경제하에서는 무조건 경쟁적으로 생산에만 열중하면 된다. 정부는 공장 짓는 것을 독려하고, 기업은 열심히 만들기만 하면 이익을 낸다. 이에 얻어지는 소득은 다시 소비로 이어지면서 바로 수요가 창출된다. 일부 저축을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렇게 모아진 자금은 다시 공장을 짓고 공급을 늘리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세이의 말대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단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가격이 유연해야 한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면, 가격이 내려가서 수요가 더 늘어 날 수 있게 된다. 실질적인 소득이 늘어나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은 생산된 물건이 모두 사회에 필요한 것이고 소비자의 니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조건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의 가격은 한번 올라가면 잘 내려오지 않는다. 가격이라는 것이 그렇게 유연하지 않다는 말이다. 생산된 물건이 모두 누군가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 가격이 싸다고 방마다 있는 TV를 또 구매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차가 2대가 있는데 추가로 다시 한대의 차를 구입하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세이의 법칙은 1929년의 대공황이 발발하고 케인즈 경제학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진리로 여겨졌던 이론이다. 세이의 법칙이 진리처럼 믿기던 그때는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때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공급만 점진적으로 늘려 가면 소득은 당연히 늘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시대의 상황에 잘 맞는 경제이론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공급이 넘쳐 나는 경제에서 살고 있다. 아니 이미 오래전인 1929년, 상점에 제품으로 넘쳐나지만 물건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공장주들은 생산량을 줄였고 실업자는 더욱 늘어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세이의 말을 너무 믿은 탓이었을까?

공급은 넘쳐 났지만, 그 제품들을 구매할 사람들이 없었다. 이제 “공급이 수요를 결정한다”라는 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수요를 건드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다시 한번 국민소득 항등식을 가져와 보자.

 Y=C+I+G+NX

이 식에서 도대체 대공황 시절에 안팔리고 쌓여있던 물건은 어디에 숨어 버린 것일까? 이 식은 늘 성립하는 항등식이다.

바로 기업의 투자인 I에 포함되어 있다. 국민소득을 계산해 낼 때 재고를 투자로 보는 이유는 한 기업이 생산했지만 팔리지 않은 물건을 그 기업이 ‘구입’한 것으로 처리하고, 재고를 미래의 판매를 위한 투자로 간주한다.  

재고가 투자로 둔갑해 버렸지만, 이 재고로 인해 기업은 내년도에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덜 생산하게 된다. 경기순환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논리다.  

하나의 경제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건강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이 충분히 소비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저축할 경우에는 그 돈을 대신 기업이 모두 소비해 줘야 한다. 여하튼 모든 사람들이 버는 돈을 모두 소비하거나 기업이 저축한 돈을 모두 투자한다면 세이의 법칙이 실현되어, 완전고용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때 맞추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경제이론은 세이 법칙의 반대인 “수요가 공급을 제약한다”는 말에서부터 출발한다. 케인즈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장경제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정부가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 사회가 완전 고용을 이루려면 모든 소득이 소비되거나 투자되어 국민소득을 만드는 순환고리 안에서 돌아야 한다. 순환과정에서 도는 돈은 개인이 소비한 돈과 기업이 투자한 돈이다. 이것이 케인즈가 말하는 유효수요다. 만약 개인의 저축과 기업부분에서 투자없이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돈이 국민소득 순환에서 빠져 나가 있으면 유효수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돈은 그야말로 잠자고 있는 돈임으로 경제성장에 하등 도움이 안된다.

케인즈는 이 때 정부가 지출(G)을 늘려서 빠져나간 돈 만큼 채워넣음으로써 유효수요를 늘려 경제활동 수준을 유지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사람들은 소득이 있으면 그 소득에서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을 하게 된다. 이런 소득의 일부는 저축으로 빠져나감으로 소비만으로 구성된 수요는 총 생산에 못 미치게 된다. 이 부족한 수요는 기업의 투자로 보완해야 한다. 개인의 저축을 모두 투자로 전환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민간기업의 투자는 기대수익과 비용인 이자율에 따라 결정된다. 저축이 투자로 이어질려면 비용보다 투자로 기대되는 이익이 더 커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기대이익이란 불확실성과 위험을 고려한 개념이다. 만약 미래의 경제적 상황이 불안할 경우 기업은 투자에 대해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기업의 투자가 완전고용을 유지할 정도에 못 미친다면, 그 부족한 부분을 정부의 투자로 채워야 한다. 이것이 케인즈가 생각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사실 정부가 수요가 되었든 공급이 되었든 시장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3가지 정책을 사용한다. 첫째는 국가의 재정지출을 조절하여 수요를 관리하는 재정정책, 둘째는 세금을 통해 투자를 조절하는 조세정책, 마지막 셋째는 이자와 통화를 조정하여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방법인 금융정책이 있다. 케인즈는 이 중에 재정지출을 통해 수요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주장했고 이 이론은 뉴딜(New Deal)정책으로 나타났다.

케인즈와 케인즈주의자란 두 가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는 민간경제가 완전고용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부가 지출을 늘려 경제를 활성화시켜 불완전고용의 틈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케인즈의 경제이론이 주장하는 “민간경제는 완전고용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재정지출로 인한 경기진작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구축효과라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축효과란 정부 지출을 증가시키면 이자율이 상승하여 민간투자가 감소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정부의 지출이 민간의 경제활동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구축효과다.

정부가 지출을 늘이려면 세금을 걷거나 통화를 늘려야 한다. 통화량 증가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인플레이션도 결국은 세금이다. 개인들이 똑 같은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처럼 세금이 인상되면 국민들은 소비를 줄일 수 밖에 없다.

정부가 공채를 발행할 경우에는 정부와 민간기업들 간의 자금경쟁이 불가피해진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 빌려 주려는 사람들보다 많아지면 이자율은 올라가게 된다. 기업은 다시 높은 이자율 때문에 자금확보가 어려워 지고 결국은 투자를 줄일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지출이 민간소비와 투자를 몰아낸다.

고전학파는 정부의 지출만큼 민간의 소비와 투자가 주는 완전한 구축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재정정책은 전혀 소용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케인즈학파는 구축효과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정책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완전한 것이 없다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경기가 침체되는 경우 도움이 되겠지만, 안정된 경제운영을 위해서 평상시의 정부지출은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부의 투자는 이자율뿐 아니라 원자재와 인건비의 상승을 자극할 수 있으며, 자원의 비효율적인 배분을 야기할 수도 있다.

더구나 재정확대를 통한 수요관리 정책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효율적인 반면에 일시적이다. 그 이유는 정부가 주도하는 대형 공사가 끝나면 또 다시 대량 실직사태가 발생하는데다가, 장기적으로는 민간 주도의 수요증가를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경제정책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일자리다. 소득이 있어야 공급을 자극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경제성장을 동반하지 않는 일자리는 결국 다른 경제요인을 건드려 부작용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의도적으로 10만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한쪽 산을 다른 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제자리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했다고 치자. 그 대가로 사람들에게 급여를 지급한다고 해서 경제가 좋아질 수는 없다. 어디선가 그 돈을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극단적인 예지만, 실업자들에게 정부가 돈을 찍어서 급여를 준다면 아마도 물가상승만 부추길 것이 뻔하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대공황 당시 미국 경제를 회생시킨 것은 뉴딜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장기호황이 막을 내리고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인 불황의 시대가 닥쳤다. 이로 인해 케인즈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30년 가까이 장기호황을 이끌었던 케인즈주의는 한계를 맞이하였다는 말이다.

사실 케인즈 이론처럼 공급이 넘쳐 나던 때에는 수요만 늘려 주면 소득도 늘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경제학자도 수요만으로 경제성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공급이 뒤따라 주지 않으면 물가만 폭발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제학자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이와 케인즈의 이론 모두 실패했으므로 둘 다 틀렸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공급이 부족할 때는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요가 부족할 때는 수요가 공급을 제약하기도 하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맞는 이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그에 필요한 이론을 만들어 낸 셈이다.

이 반쪽만 맞는 이론을 같이 맞추어 보자. 세이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말한 반면, 케인즈는 수요가 공급을 제약한다고 하였다. 이를 합쳐서 정리하면,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고 수요가 공급을 못 따라가면 경기는 후퇴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늘지 않으면 당연히 성장은 없다. 그리고 공급이 넘치는데 수요가 줄어든다면 경기는 하강할 것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은 공급이 이끌고, 경기변동은 수요가 만들어 내는 셈이다.

<source:https://www.wallstreetoasis.com/resources/skills/economics/kondratieff-wave>

경제성장은 공급부문에서 이뤄진다. 신제품이나 신기술의 개발이 모두 공급부문에서 이뤄지고, 이것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그러나 공급부문이 독주할 수는 없다. 공급부문에서 일어나는 신제품이나 신기술의 개발은 수요에 의해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수요의 뒷받침 없이 공급만 증가한다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 뻔하고, 공급주체인 기업은 당연히 수익이 감소하고 공급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간단하게 말해서, 수요가 경기변동을 주도하는 것이다.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게 있어 경제성장은 생산요소의 새로운 결합 및 기술혁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공급’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다. 요즘 말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이란 바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의미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정부는 이미 언급한 재정지출, 조세, 통화공급 등과 관련한 정책을 통하여 경기순환을 순화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정부는 극단적인 경기변화를 막기 위해 경제침체기에는 경기를 자극하고, 팽창기에는 경기를 억제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경기가 부진하다고 함부로 수요정책을 펼치면 성장잠재력을 해치고,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 함부로 공급정책을 펼치면 경제안정을 해칠 수 있다. 그래서 각 국가는 새로운 산업으로 성장을 추구하고자 노력한다.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공급을 자극할 뿐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요와 공급이 같이 움직이는 경제원리에 맞는 정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성장 없이는 경제성장도 있을 수 없다. 그곳에서 새로운 물리적 기술과 사회적 기술 그리고 사업화 기술의 혁신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슘페터의 기업가 정신이 경제성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