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부동산 거품과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부동산 거품과 잃어버린 10년

1989년 10월 31일 뉴욕 타임즈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인 미쓰비시가 미국 뉴욕의 록펠러 센터 지분51%를 매입했으며, 앞으로 지분을 더 늘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상징적 건물인 록펠러센터가 일본 기업에게 팔렸다는 소식에 ‘미국의 혼이 팔렸다’는 탄식이 터지면서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다. 1990년에는 일본 부동산 업체 미노루이수타니 그룹이 세계 최고 골프장의 하나인 캘리포니아 페블비치 골프 코스를 사들였다. 그 뿐 아니라 계속해서 티파니, 엑슨과 같은 미국의 유명한 빌딩들이 일본 기업들에게 팔려나갔다. 1988년 상영된 영화 다이하드의 배경이 되는 건물의 이름도 나카토미 빌딩이다.

이렇게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 일본은 전 세계 부동산을 싹쓸이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영화사 콜롬비아와 CBS 레코드 등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사업도 팔려 나갔다. 일본은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이 계속 축적되고 있었으며,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정점이었던 90년 일본의 토쿄만 팔아도 미국 본토 전체를 사고도 남을 정도로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버블은 그 단어가 의미하듯 작은 외부의 충격에도 꺼지게 되어 있다. 주식시장이 제일 먼저 반응하였다. 1989년 12월 말 사상최고치인 38,915를 기록한 니케이 지수가 1990년 초 거품이 터지기 시작하여 90년 10월에는 최고치의 절반 수준인 2만으로 하락하고 말았다.  

진행과정

“버블의 경제적 장점은 없었다. 있다면 단점 뿐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이번 경험이 얻은 교훈이다.” 일본의 경제기획청이 ‘버블경제의 교훈과 새로운 발전에의 과제’란 경제백서에서 내린 결론이다.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1990년대 일본의 장기불황은 주식시장의 붕괴와 부동산 거품 붕괴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90년 주가의 폭락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은 계속 상승하면서 91년 최고점을 치게 된다. 시간이 문제였지 그 정점을 지나자 부동산이 폭락하고 금융회사와 개인의 파산이 속출했다.

부동산 가격은 91년 한 해에만 30%가 폭락하였고, 그 다음 해인 93년 다시 30%가 폭락하면서 단 2년 만에 60%가 폭락하는 혁명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면서 부동산 담보대출로 돈을 빌린 기업이 몰락하고, 돈을 빌려준 은행도 연쇄 붕괴하는 등 경제 전반의 동반 부실화가 진행됐다.

본업을 잊고 부동산투자에 나섰던 알짜기업들이 부동산 투자 실패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은행들도 부실채권의 급증으로 해마다 ‘금융위기론’에 시달렸다. 경영에 책임을 졌던 기업인들이 일본식 ‘할복’으로 종업원과 고객에게 사죄하는 사건들이 속출했다.

이후 계속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침체기를 맞이하게되고 대량실업자와 주택가격과 주식시장이 끝없이 하락하게 된다. 여기에 일본정부는 금리인하 정책으로 대처했고 급기야 제로금리에 이르게 되었다. 경기하락으로 어려워진 일본 기업들은 그 동안 사모았던 미국의 부동산을 다시 헐값에 팔아야만 했다. 미쓰비시는 1995년 록펠러센터 주식 포기를 선언했다. 미노루이수타니도 불과 2년 만에 3억4000만달러를 손해본 채 페블비치 골프장을 되팔았다.

위기의 원인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단지 일본 정부의 정책문제가 아니라 세계경제와 연결된 문제였다. 80년대 초 미국에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개인 소득세를 대폭 삭감하고 재정지출은 유지함으로써 대규모 재정적자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재정정책은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가져왔고 특히 일본에 대한 무역적자는 85년 4백29억 달러로 확대됐다. 또한 미국의 고금리에 의해 미국으로의 자본유입 되어 달러 강세가 계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쌍둥이 적자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다.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의 확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미국은 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프랑스, 독일, 일본, 미국, 영국 등 이른바 G5 재무장관 회의에서 당시 달러화의 가치상승이 세계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달러 강세 현상을 시정해 줄것을 요청한다.

즉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라도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하라는 것이 이른바 ‘플라자합의’이다. 이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자 독일 마르크화는 1주 만에 달러화에 대해 약 7%, 엔화는 8.3% 각각 오르는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고, 이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30% 이상 급락했다. 일본의 엔화가치가 높아졌다는 말이다. 1984년 1달러에 244엔이었던 것이 2년 만에 160엔이 되었다. 엔화가치의 상승으로 일본은 무역에 있어서 가격 경쟁력을 잃게되었다. 실제로 이 플라자 합의로 인해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무역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의 수출도 놀랍게 성장하였다.

미국 제조업체들 역시 달러 약세로 가격경쟁력을 회복하고 90년대 들어 해외시장에서 승승장구했으며,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찾아갔다.

일본정부는 이런 수출의 축소를 내수시장의 활성화로 해결하려 하였다. 무엇보다 엔화 강세에 따른 수요 위축에 대응하기 위하여 저금리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기대했던 것처럼 일본의 기업과 국민들은 소비를 늘리지 않고 오히려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저축정신이 일본경기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당시의 일본의 제조 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제조업체가 아니었다. 회사의 잉여자금을 투자자산과 부동산에 투자함으로써 투자회사로 변모하였다.

더구나 당시 대장상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는 자산을 두 배로 늘리자는 ‘자산배증론’을 내걸고 틈만 나면 일본은행에 금융완화 압력을 넣었다. 자산배증론이란 60년대 장기 집권에 성공한 사토 총리의 ‘소득배증론’에 대칭되는 주장이었다. 소득이 늘어났으니 이제 자산을 배로 늘리자는 주장임으로 결국 부동산 가격을 올리자는 말이다.

이때 일본 경제에 미칠 새로운 변수가 나타났다. 1987년 10월 19일 월요일 뉴욕증권시장에서 다우존스지수가 22%나 하락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수치는 대공황의 발단이 된 검은 목요일 보다 더 큰 폭락이다. 이 여파로 세계 각국의 증시가 동반 폭락하면서 이 날을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이라고 불렀다. 뉴욕의 주가폭락은 미국을 위시한 전세계에 공황 발발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고, 미국은 이에 세계 주요 중앙은행들로 하여금 금리를 낮추고 통화량 공급을 늘리도록 압박했다. 

1988년 1월 열린 레이건 미대통령과 다케시다 일본총리간 정상회담에서 레이건은 일본에게 금리인하를 요구했고, 그 결과 공동성명에 “일본은행은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달성하고 외환시장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단기금리가 계속 낮아지도록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일본의 중앙은행은 1989년 상반기까지 금리에는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9년 5월에 이르러서야 콜금리를 2.5%에서 3.25%로 높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투기바람에 휘말려든 일본 주가와 땅값은 꿈쩍하지 않고 상승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던 89년 8월 거품경제를 유발시킨 미야자와 대장상이 물러나고 하시모토가 대장상에 취임하여 강력한 긴축 정책으로 버블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거품 해결사로 불리던 미에노 야스시 가 일본은행의 총재로 부임하자 곧 바로 금리 인상을 단행하여 90년 9월까지 16개월간 공정금리를 2.5%에서 6%로 수직 상승시키고 말았다. 대공황 직전 3.5%였던 기준금리를 6%로 올렸던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와 너무나 유사한 정책이 실행되었고, 마찬가지로 자산버블의 급속한 붕괴와 경기침체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부동산의 거품이 금융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결국 부채때문이다. 부동산시장이 활황일 때는 담보가 되는 부동산의 가격이 높기 때문에 가격대비 대출금이 점차 하락하게 된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금융기관에게는 위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일단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게 되면 대출은 담보가치에 비해 커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잘못은 금융기관이 수익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담보가치에 의존하는 경우 그 위험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의 버블붕괴는 부동산 담보대출의 부실채권화로 나타났으며, 지속되는 경기침체는 다시 부실채권을 만들어 내고 다시 불황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게이오 대학의 카네코 마사루는 자신의 저서 <일본재생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대일무역적자를 만회하고자 힘으로 밀어붙인 ‘프라자 합의’가 버블경제가 발생된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원인이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가장 큰 주범은 ‘금융완화’를 계속해서 실시해 온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엔고로 인해 버블 붕괴 등 지금까지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97년까지 일본의 대형부동산회사가 거의 망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막대한 공적자금을 이용해 은행이 망하지 않도록 계속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카드 빚을 다른 카드로 돌려 막듯이, 정부의 공적자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97년 금융 대파산이 일어나고 말았다. 시중 금융기관은 하나도 파산시키지 않겠다던 일본 정부의 정책이 오히려 경기침체를 장기화 시켰다는 이야기다.

위기극복과 그 이후

“거품은 한번 발생해 버리면 자산 분배를 불평등화하여 자원배분을 비뚤어지게 하는 등 경제적으로 큰 비용을 가져온다. 거품의 발생은 가계와 기업이 보유한 자산가치를 높임으로써 일부 경제주체를 부유하게 해 국내 수요를 확대시키고 성장률을 높이는 효과는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반드시 반동적인 디플레이션 효과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거품의 생성과 붕괴의 과정을 통하여 보면 거품에 경제적 장점은 없고 있는 것은 결점만이라는 것이 이번의 경험이 가르치는 바이다.”

일본 경제기획청이 1993년 경제백서에 기록한 거품경제에 대한 교훈이다.

하지만 일본의 읽어버린 10년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누가라도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해서는 무모할 정도로 긍정적인 해석한다는 것이다. 거품이 발생할 당시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개인의 자산은 늘어났고, 기업에게는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경우 걱정보다는 현실을 즐기는 것이 사람이다.

부동산 거품의 붕괴가 있은 후에도 일본은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바탕으로 엄청난 돈을 경기부양을 위해 쏟아 넣었다. 반면 근면하고 절약정신이 강한 일본의 국민성은 정부의 생각과는 반대로 소비를 극도로 자제했다. 일본 정부는 부양책을 통해 돈이 시중에 유통되어서 경제가 살아나기를 바랬으나, 일본 국민은 그 돈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은행에 저축하였다. 돈이 다시 은행으로 돌아오고, 돈을 빌리는 사람들이 없으니 돈이 늘어날리가 없었다. 돈은 부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인당 세계 최고의 부자는 일본이다. 일인당 개인 자산 18만달러로 미국의 1.3배 독일 프랑스의 2배이며, 전체 경제규모로도 세계2위인 막강한 나라 일본은 아직까지 무역흑자를 지속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의 이자소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999년 이후 일본의 실질 금리는 0%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저축으로 돈이 돈을 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일본 돈은 높은 금리를 제공하는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나라의 부동산과 같은 높은수익이 기대되는 곳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런 흐름에도 헤지펀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헤지펀드들이 찾은 방법은 이른바 통화 간 금리 차를 이용한 차익 거래 방법이었으며 그것이 일본의 제로금리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 그것이 바로 엔 케리 트레이드(Carry Trades)의 탄생이다. 헤지펀드들은 이자가 낮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빌려, 이자율이 높고 투자 수익이 큰 호주, 뉴질랜드, 한국 그리고 아시아 개도국 등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이 돈은 일본에서 빌린 돈이며 언젠가는 일본에 갚아야 하는 돈이다. 세계경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 같은 엔케리 트레이드의 청산으로 갑자기 세계 전반에 투입된 자금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경우다.

일본 돈을 찾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일본 엔화의 가치가 올라갔다. 실제로 일본의 엔화는 미국의 달러화와 유럽의 유러화에 비해 급속도로 가치가 상승하였다. 이는 일본의 수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해외에서 일본제품의 가격 상승을 유발한다. 반면 일본의 제로금리는 일본의 국민들에게 이자소득의 상실을 의미한다. 일본국민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국가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