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시작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다시 한번 세계경제가 다른 나라의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한국의 3저 호황도 그리고 외환위기도 결국은 우리가 지구촌 시장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그 전부터 우리는 세계경제의 한 일원이었다. 수출로 성장했으며, 넓은 세상을 보면서 물리적 사회적 기술을 익혀왔다.
반면 우리가 금융시장 또는 자본시장을 외국에 개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예를들어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개방된 것은 90년대 초의 일이다. 90년 초만 해도 외국인이 한국의 주식을 소유하려면 투자신탁이 판매하는 외수펀드를 통해야 투자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름이 시사하듯 외수펀드는 외국인전용 수익증권이라는 말이다. 그 후 점차 직접 투자 허용폭이 커지다가, 외환위기가 진행되던 1998년 5월 25일 외국인 투자제한은 사라졌다.
그 후 외국의 자본은 한국의 저평가된 주식시장에 물밀듯이 들어와 2004년에 한국 주식의 시가총액 40퍼센트가 넘는 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급작스럽게 우리날의 주식시장이 상승한 것도 외국인 자본이 주식시장에 들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알고 있는 회사들은 더 이상 한국의 기업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포스코의 외국인 지분이 한때 54%를 차지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와 이동통신의 강자 SK텔레콤도 마찬가지다. 2024년 4월 현재 삼성전자의 55%가 외국인이다.
우리가 만나는 주식시장은 온통 외국기업으로 가득차 있다. 아니 이제 한국인 외국인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문제는 이들이 장기 투자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금의 규모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도 금융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외국인 자본은 2005년부터 차익실현을 목적으로 주식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2007년 6월부터는 투매에 가까운 매도가 일어났다. 월가의 자금 유동성 부족을 메우기 위해서다. 2008년 한국의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가 급락한 이유는 대체로 이 때문이다.
국제금융은 사실 늘 음모론으로 포장되기 일수다. 자금의 움직임 자체가 한 정부의 통제에서 벋어 나기 때문이다. 과거 국제금융의 핵심에 로스차일드가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조지 소로스로 대표되는 헤지펀드가 자리잡고 있다.
로스차일드가가 국제금융가에 등장한 한 것은 1700년대 후반 독일의 한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의 왕 윌리엄 9세의 자금을 관리 맡게 된 후였다. 로스차일드가의 시조 마이어 암셀의 다섯 아들이 각기 유럽의 주요 도시에 은행을 설립하면서 국제금융의 재벌로 떠오르게 된다. 이들에게는 자금과 정보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1810년 런던 증권거래소의 지배자 베어링이 죽자, 런던에 거주하던 로스차일드가의 셋째 아들 네이선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럽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온이 승리했다는 거짓 뉴스를 흘려 주가를 폭락시킨 후 주식을 긁어 모았다. 1815년 7월 19일 런던 증권거래소가 폐장 되었을 때 네이선은 거래소 상장 전체 주식의 62%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나폴레온 이 패배했다는 진짜 정보가 날아들자 주식은 반등하고, 네이선의 하루사이에 20배가 넘는 차익을 남겼다고 한다. 이처럼 로스 차일드가는 세상의 소란을 틈타 부자가 되었다.
1981년 영국의 투자 권위지 <기관투자가>는 소로스(George Soros)를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펀드매니저로 선정했다. 그러나 10여년 뒤인 1992년, 영국인들은 그 위대한 펀드매니저를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소로스의 헤지펀드에 당했기 때문이다. 소로스는 언론을 통해 ‘파운드화 대폭락’을 예언하면서, 한편으로 막대한 현금을 동원해 영란은행을 공격하였다. 그가 직접한 동원한 현찰만도 100억 달러정도였고, 소로스의 뒤를 좇는 자금까지 합치면 1천 100억달러에 달하는 공세였다. 결국 영란은행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소로스의 이름은 국제적으로 높아졌고, 중앙은행들이 자칫 외환정책을 잘못 운영할 경우 헤지펀드의 먹이가 될 수 있음을 국제사회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조지 소로스는 1992년 영국을 초토화한 데 만족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93년 7월과 8월, 프랑스 프랑화, 벨기에 프랑스화, 덴마크 크로네화 등이 또 다시 독일 마르크화에 대해 폭락하는 유럽통화 위기가 발발했다. 소로스는 다시 유럽 전역의 중앙은행들을 상대로 환투기를 벌였으며, 이들부터 영란은행에서 얻은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소로스 역시 각 국의 위기를 돈벌이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 소로스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자본주의의 악마` 라고 불렀다. 90년 대부터 본격적으로 수면에 모습을 나타난 헤지펀드는 이름과는 달리 ‘고소득, 고위험’을 추구하는 펀드들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헤지(hedge)`는 `울타리를 치다, 손해를 막다`를 뜻하며, 금융에서는 위험을 헤지한다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하는 단어다. 하지만 헤지펀드란 한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익률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기세력이다.
투기세력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이유는 이 펀드들의 특징은 과도한 부채를 용인한다는 것이며 공매도를 투자방법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언급하였듯이 공매도는 갖고 있지 않은 증권을 빌려서 매도한 다음 일정 기간 후에 시장에서 사서 되갚는 방법이다. 주가하락에 배팅을 하는 격이니, 주가가 하락할 때 수익을 낼 수 있다. 헤지펀드는 이런 방법으로 주로 환, 파생상품, 스왑 등 수익이 되는 것에 닥치는 대로 투자하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장가격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비효율적 시장을 찾아 차익거래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론적으로는 이런 헤지펀드의 전략은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평가된 자산을 팔고 저평가된 자산에 투자하는 헤지펀드의 움직임으로 비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격을 수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이 타켓이 된 것도 영국정부가 인위적으로 파운드화의 가치를 떠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나라의 정부라도 자국의 통화가치나 주식시장에 목표를 설정하여 지원하는 곳이 타켓이 되기 싶다. 그런 비효율적 시장이 헤지펀드의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에서 특정 국가의 화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방법도 차입과 공매도 전략이다. 즉 공략 대상의 나라의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달러를 사들이거나, 공략 대상의 돈을 공매도 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계속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략했던 돈이 폭락하면 상대적으로 가치가 높아진 달러를 팔고 헐값이 된 나라의 돈을 그 나라 돈으로 갚으면서 이익을 챙기게 된다. 공매도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싼 값으로 공략한 나라의 돈을 사서, 정산 해버리면 그만이다.
누군가 우리나라에서 달러를 무한정 사들이면 결국 달러의 가치는 올라가고, 원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자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헤지펀드 처럼 공매도를 하거나 돈을 빌릴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이런 정도라면 시장의 비효율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조작이 된다는 것이 문제다.
조지 소로스가 스스로 자신은 “위기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고 말했듯이 위기가 있는 곳이 헤지펀드의 목표지점이 된다. 92년 영국 파운드화 폭락, 94년 멕시코 금융위기, 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 사태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 등의 배경에는 빠짐없이 헤지펀드의 핫머니가 등장했었다. 더구나 이들은 여러가지 규제를 피하기 위해 케이먼 군도등 조세회피지역에 페이퍼컴퍼니(paper company)를 세운다.
헤지펀드는 1949년 알프레드 존스가 롱숏 펀드를 출시한 것이 시초다. 이후 1986년 타이거펀드를 운용한 줄리안 로버트슨과 1992년 퀀텀펀드를 이끈 조지 소로스가 놀라운 수익률을 보여주면서 헤지펀드들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타이거펀드는 첫 6년동안 연간 43%의 수익률을 올렸고, 조지 소로스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도 같이 1992년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한 달만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렇다고 모든 헤지펀드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1994년 월가에서 명성을 날리던 펀드매니저와 파생상품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머튼과 마이런 슐즈,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차기 의장감으로 거론되던 데이비드 멀린스 FRB 부의장까지 참여하여 완벽한 드림팀이 구성됐다. 이론과 실전으로 무장한 꿈의 헤지펀드,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를 설립된 것이다. 하지만 이 펀드는 4년만에 1,200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날리고 파산했다.
롱텀캐피탈은 러시아 국채선물을 대거 매입하고 미국 국채는 공매도 하였다. 하지만 1998년 8월 17일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러시아 채권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다. 소로스의 퀀텀펀드도 좋은 시절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4과 1995년초 엔화에 투자했다가 6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때는 20억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1999년 유로화에 대한 투자가 실패로 끝났고, 1990년대말 첨단 IT주에 과도하게 투자했다가 닷컴버블 붕괴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 후 퀀텀펀드는 이름을 바꾸고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의 싱크탱크인 국제금융센터(IFSL)는 국제금융시장에는 1만개가 넘는 헤지펀드가 활동하고 있으며, 그 자산규모는 2조달러가 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각국의 금융시장 개방으로 하나가 된 국제금융시장에서 이런 정도의 자본이 함께 움직인다면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다. 아시아의 외환위기도 결국은 이런 펀드로부터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1996년에 우리나라를 포함해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5 개국에 들어온 외국자본 규모가 1000억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1997년 들어 급하게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나라가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다. 2008년 말 한국의 주식시장의 폭락에도 헤지펀드의 영향이 존재하였다. 헤지펀드는 결국 주가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중에 거품을 만들고, 반대로 자금 이탈을 가속시키며 스스로 만든 거품을 터뜨렸다.
이런 정도라면 비효율적 시장을 효율적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격형성에 참여하여 가격을 조작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인 셈이다. 더구나 상대는 대부분 많은 난쟁이들이 모여있는 시장이다. 소로스는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이런 투자자의 행태를 참여적 기능 또는 조작적 기능이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한마디로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영향력을 행사하여 시장을 조작하는 행위다. 국제금융시장의 거인 중에 하나지만 결코 착한 백설공주라고 하기는 어렵다.
위기가 올 때마다 10년 주기설이 등장한다. 한국에는 부동산과 주식에 10년 주기설이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경제는 10년을 주기로 불황과 호황을 경험했고, 부동산과 주식의 10년 주기는 그러한 경기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한 개인의 인생도 10년 주기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에게나 10년 마다 기회가 오고 또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도 10년 주기설이 있다. 축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10년 마다 자신의 나라에 최강의 축구팀이 생긴다는 희망이 담긴 주장이기는 하다.
경제학에도 쥐글라 파동이라는 10년 주기 경기순환이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설비투자로 설명되는 이 순환주기로 오늘날 위기의 10년 주기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70년 대 오일쇼크, 80년 대 중남미 외채위기, 90년 대 아시아 외환위기 그리고 2000년 대 미국 발 금융위기 등 10년마다 세계적 경제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10년이면 작은 변화들이 모여 눈에 띄는 큰 변화를 만들어 내거나, 지난 위기를 모두 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모든 경제위기는 유사하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 새로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적 공황(Panic)에 빠져들게 하며, 변화를 위기로 증폭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위기에 여지없이 유사성이 나타난다. 브라질에서 한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 돌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데, 전 세계를 강타한 큰 사건과 당시의 중요한 정책이 그냥 사라져버렸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