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경제의 핵심 주제인 돈은 실물경제의 시장을 잘 작동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의 발명품이며 사회적 기술의 하나다. 불, 수레바퀴, 돈을 인류의 3대 발명품이라고 하지 않던가? 돈 없는 경제를 상상하기 조차 쉽지 않다. 돈으로 구성된 금융경제도 본질적으로 실물경제의 한 부분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억지로 금융경제를 실물경제에서 따로 떼어놓아 버리면, 오직 돈으로 이루어진 세상만 남을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돈이란 현금, 수표, 주식, 채권, 파생금융상품 등 거래나 가치저장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며 기본적으로 약속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들이다. 약속이 깨지는 순간 그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사람들의 약속이라는 것이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실물경제에서 독립된 금융경제 자체는 언제라도 허상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이유
콜롬버스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향했을까? 학교에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모험심때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가 모험을 무릅쓴 것은 돈 때문이었다. 그가 맺은 당시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과의 계약을 보면 그렇다. 계약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그가 발견한 토지의 영주가 될 수 있었으며, 거기서 얻는 재물의 1/10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사벨은 벤처개피탈을 제공한 자본가고 콜럽버스는 벤처 기업가였던 셈이다.
콜럼버스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해둔 황금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방견문록의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The Description of the World)이다. 이 책에 마르코 폴로는 “중국 동쪽의 섬나라인 지팡구는 궁전의 벽마저도 황금으로 세울 만큼 금이 넘쳐 난다”고 기록해 두었다. 지팡구는 오늘 날 일본을 가리킨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이외에도 상상력을 동원해 동방견문록을 썼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 황금이 콜롬버스를 1492년 8월 3일 에스파냐의 팔로스 항구에서 서쪽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화폐의 탄생
마르코 폴로는 뻔쩍이는 ‘금’을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콜럼버스가 이 곳에서 본 것은 돈이었다. 유럽의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돈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콜롬부스가 신대륙 탐험 중이던 1503년 남아메리카 자메이카에서 띄운 편지에 이런 귀절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은 경제적인 의미에서 돈을 가리킨다. 실제로 콜럼버스뿐 아니라 많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신세계를 찾아 떠나게 한 동기는 돈이었다. 아프리카의 사금과 아메리카의 금은 유럽에서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과 아라비아 영토에 있는 금광들은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이 때 포르투갈이 처음 눈을 돌린 곳은 아프리카 대륙의 끝에서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항구 세우타였다. 세우타는 사하라 사막의 무역로를 통해 들어온 아프리카와 인도의 금, 상아, 노예들이 거래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은 항해의 왕자라 불리는 엔리케(Enrique, 또는 엔리히)의 지휘아래 세우타를 점령했으며, 이 세우타에서 빼앗은 금괴 제조시설로 독자적인 금화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금속화폐는 아무래도 가지고 다니기가 어렵고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는 등 많은 불편함이 있다. 거래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다. 이런 비용 때문에 중국에서 일찌감치 지폐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사용을 중지했다. 유럽의 경우 1587년 이탈리아의 베니스 은행이 유럽최초로 지폐를 도입하였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1609년 네덜란드는 금으로 바꾸어 주는 지폐를 발행하였다. 지폐 한장 한장은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금에 대한 영수증과도 같은 것이다. 이 화폐가 현재까지 통용되고 있는 네덜란드의 길더화다. 당시의 유럽 사람들이 암스테르담 은행과 그 곳의 상거래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은행이 발행한 지폐와 똑 같은 양의 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사람들은 지폐가 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믿었으며 카르비안 해적에 나오는 금괘짝에 가지고 다니는 금보다 편리했음으로 누구나 선호했다. 실제로 이 지폐는 한 때 해당금액의 금보다 3%이상의 프레미엄이 붙어 통용되기도 하였다. 시장에서의 거래비용을 줄여준 가치를 인정해 준 것이다.
네덜란드는 결국 상업무역의 중심지라는 이점과 믿을 수 있으며 편리한 화폐를 가짐으로서 1600년부터100년에 걸쳐 유럽 상업무역 패권을 거머쥐었다. 당시 이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유럽의 무역 거래량의 50% 이상을 거래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였다. 지폐의 사용은 다시 주식거래소와 은행 그리고 유가증권이 발달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이웃나라는 물론 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도 네덜란드의 금융시장을 이용했다는 것을 보면 신뢰가 매우 높은 시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폐로 금화를 대신한다는 것은 쉬운 생각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지폐보다 더 획기적인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 최초의 불환지폐 즉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는 지폐를 발행한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John Law)가 그 사람이다. 존 로는 금융가의 아들이며 경제학자이면서 고국을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면서 도박으로 돈을 모은 사람이다. 아마 네덜란드의 길더화를 유심히 관찰하고 분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아도 되는 지폐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유럽 전역을 돌아다녀도 그의 아이디어에 귀를 기울여주는 나라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험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당시의 유럽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경제규모에 비해서 화폐를 만들 수 있는 금이 부족하던 시절이다. 돈이 없으니 시장의 거래가 줄어들고 시장의 거래가 주는 만큼 생산과 일자리도 줄어 경제가 침체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루이 14세는 유럽 여러나라와 치룬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을 짓는 등 왕조의 사치로 늘어만 가는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 때 존 로가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고 프랑스 국왕의 섭정으로 선출된 오를레앙 공작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곧 의기가 투합되었다. 잘하면 엄청난 국가의 채무를 돈을 인쇄해서 손쉽게 청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존 로는 그렇게 프랑스 왕조로부터 지폐 발행권을 가진 사립은행의 허가를 받아냈다.
존 로는 즉시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미시시피의 서쪽 루이지애나 지방의 땅에 묻혀 있는 금을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루이지애나 지하에 금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주느냐가 핵심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부로봉 왕조는 이 돈으로 루이 14세 이래의 왕가의 부채를 처리하였고, 존 로 역시 부자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경제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존 로의 사립은행은 곧 왕립은행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인플레이션이었다. 지폐의 발행고가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고, 사람들은 지폐를 금으로 바꾸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루이지애나에 묻혀있는 금을 내줄 수 있는 방법이 존 로에게는 없었다. 1720년 말 루이지애나 신화는 꺼져버리고. 이로인한 경제적 불안정과 경제의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는 점점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금융기관 이름에 파리 은행 banque national de paris 처럼 ‘은행(Banque))’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지만 리용은행(Crédit Lyonnais)처럼 ‘신용 (Credit)’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보였지만, 존 로의 시도는 몇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는 그 이후로 200년 정도를 기다려야 했지만,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아도 되는 지폐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는 화폐발행권을 정부 또는 왕에게 일임하면, 필요에 따라 돈을 남발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 따라서 화폐를 발행하는 유럽의 은행은 민간은행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국유화하더라도 중앙은행은 가능한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정부에 120만 파운드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윌리엄 패터슨이 화폐발행 독점권을 얻어 1694년 세운 민간은행인 영국의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은 1946년 국유화되었다. 1800년 나폴레온이 세웠던 프랑스의 파리은행은 1936년에 국유화되었다. 반면 미국의 중앙은행은 아직도 형식상 민간은행이 주주로 있는 민간은행이다. 중국에서 발행된 <화폐전쟁(Currency Wars)>과 미국을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유포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the movie). 즉 시대정신도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지난 3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발생한 큰 사건에는 국제금융 자본세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겪은 글로벌 금융위기도 예외가 아니다.
화폐발행 권한이 없는 미국과 유럽의 정부는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중앙은행의 진짜 주인인 국제금융 자본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력이 워털루 전쟁이후 지금까지 세계경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배해 왔으며 1~2차 세계대전, 1929년 대공황, 1970년대 석유위기, 1992년 소로스의 영국파운드화 저격 사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등도 국제금융 자본세력의 음모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은 정부의 독단적인 화폐발행의 남발을 견제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된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은행이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대공황이후 미국의 의회는 1933년 은행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분리하고, 정부의 국채를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의 담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당시의 대통령루즈벨트는 모든 금과 은에 대한 증서를 회수하여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도의 종말을 선언했다.
반면 불안정한 오늘날의 화폐의 문제점을 들어 다시 금본위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세계교역량이 매년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본위제 시대로 돌아갈 만한 여건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가장 믿을 수 있는 통화는 금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금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현재까지의 지구에서 채굴한 금을 모두 합하면 약 15만톤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에 약 2만2천톤이 산업용도로 사용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12만 8천톤의 1/4이 금괴로 만들어져 공식 보관되고 있으며 나머지 3/4인 9만 6천톤은 개인이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금을 전 세계 인구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면, 일인당 20g이 안된다. 만약 금을 반지로 만들어서 나누어 준다면 약 5돈짜리 반지를 하나씩 줄 수 있을 뿐이다. 금을 화폐로 사용하려면, 금을 더 많이 캐던지 아니면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라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