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주식시장의 역사

한국 주식시장의 역사

조선 시대에는 아직 주식시장과 같은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1880년 유길준, 김옥균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을 통해 조선에 처음 주식회사 제도가 알려지기 시작한 듯하다. 특히 김옥균은 1883년 한성순보에 기고한 글 ‘회사설’에서 당시 서양의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식회사 제도 덕분에 서양은 조선과 청나라 보다 부강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에도 거대 지주나 거상 등은 있었지만, 소유와 자본이 분리되지 않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개인인다.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건설하는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인 조직일 수밖에 없다. 김옥균은 그런 점을 알아차린 탓인지 우리 조선도 주식회사를 도입해 철도, 선박, 토지개량회사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어떻게 모집하고 매매하는지 주식회사들의 특징에 대해 알렸다. 이후 조선에도 주식회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지금 서양 각국에서는 회사를 설립하여 상업을 장려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이것은 나라의 부강을 이룩하는 기초로 되는 것” – 한성순보, 김옥균


주식회사의 탄생과 거래소 등장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로는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꼽힌다. 학계 일각에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같은 해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大朝鮮苧麻製絲會社)나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 은행이 한성은행보다 먼저 설립되었다는 내용을 근거로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1897년에 법인 설립인가를 받은 한성은행이 한국 최초의 법인으로 1995년 한국기네스협회의 기록 되고 있다. 이후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의 1906년 한성농공은행,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주식회사가 탄생하였으니, 이제 그 거래를 할 시장이 필요했다. 1896년 인천에 인천취인소에 이어 경성에 주식거래시장을 만들자는 요구가 생겨조선총독부는 1920년, ‘경성현물주식취인시장’ 이라는 이름의 거래소 개설을 허가했다. 그후 인천취인소와 경성취인소가 합병하여 1932년 조선취인소로 재탄생하게 되었다.그러나 당시 거래된 회사는 대부분 일본인이 설립한 주식회사였다. 주식거래를 중개하는 증권회사 중에는 1933년 설립된 금익증권과 1934년 설립된 동아증권이 조선인 소유 주식회사였다.

그럼에도 조선취인소가 발족하면서, 증권거래제도가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당시 제정된 조선취인소령은 거래방법과 시장시세 결정방법, 그리고 허위매매를 금지하는 등의 규정을 포함하고 있어 시장의 안정성과 공정성을 추구하였다.


대한증권 거래소 설립

1945년 : 해방과 함께 조선증권취인소 폐쇄
1947년 : 최초 복권인 올림픽 후원권 발행
1949년 : 재무부 면허 제1호로 대한증권주식회사 설립
1950년 : 건국국채, 지가증권 발행
1953년 : 대한증권업협회를 창립
1954년 : 산업부흥국채 발행
1956년 : 대한증권거래소 설립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다. 그 이후, 미 군정은 군정명령 43호를 내려 증권시장을 폐쇄해 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증권 거래가 뚝 끊겨버렸다. 거래소는 사라져버렸지만, 명동 주변에서 장외의 형태로 주식 거래는 계속되었다. 일제 시대의 조선증권취인소 상장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가 존재하자, 해방 전 증권업계에 종사했던 인물을 중심으로 증권시장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어 1947년 증권계, 금융계 및 관계출신인사 40여명으로 ‘증권구락부’를 결성하였다. 이 모임이 1949년 11월 증권업면허 1호를 기록하며 현 교보증권의 전신인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로써 조선증권취인소 해산 이후 중단됐던 증권거래가 비로소 허가된 증권회사 영업점을 통해 재개됐다.


이 후 경남출신 지주를 중심으로 한 고려증권주식회사가 1952년 8월 인가를 받은 것을 비롯해 1953년에는 영남증권(주), 국제증권(주), 동양증권(주)이 차례로 정식 인가됐다. 이들 5개 증권회사들은 1953년 10월 증권업협회 설립될 때까지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활발한 영업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56년엄 3월 마침내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한 투자재원의 조달을 위하여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다.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대한해운공사, 대한조선공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경성방직, 대한증권거래소, 한국연합증권


이 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는 12개에 불과했고 그마저 아직 주식분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증권은 대부분 채권이었다. 실제로 이 당시 증권은 바로 국채를 의미할 정도로 대한증권거래소는 건국국채(建國國債)의 매매를 중심으로 하는 국공채시장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증권파동

당시 기업 상장에 대해서 기업인들도 부정적인 편이었고 대중도 증권거래라고 하면 도박을 연상할 정도로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여기에 1961년 주가 조작으로 인한 증권파동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그 발전을 뒤로 밀어야 했다.

당시 명동에 위치한 증권 거래소에는 상장주식이라야 아직 12개 종목에 불과했고 그 마저 시장의 주류는 대증주(증권거래소)와 연증주(증권금융), 한전주(한국전력) 등 3개 주식으로 전체 거래량의 93%를 점했다. 최초 12개 회사 중 경성전기와 남선전기는 통합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로 이름이 변경된 후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명동은 투자자들의 열기로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 속에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부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행정부와 입법부 등을 사실상 장악했지만 민정 이양을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선거를 위한 자금이 필요해진 것이다. 여기에 중앙정보부가 나서 공공사업인 한국전력 주식을 사들여 한전 주가를 올려 폭리를 취했다. 중앙정보부는 민간인의 이름으로 ‘통일증권’ ‘일흥증권’ ‘동명증권’ 세 증권 회사를 설립하고, 대한증권거래소주식의 주식을 70%가깝게 매입하였다. 그리고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증권시장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박정희 정부의 발표가 나왔다. 주당 5전에 거래되던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이 1962년 4월 18일에는 21환 10전까지 폭등했다.

하지만 거품이 생기면 붕괴하는 시점에서 나타나듯 당시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주가 폭등을 의심한 투자자들 있었다. 한 두 사람이 주식을 매도 하기 시작하자, 매도가 쏟아지면서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파동으로 번지고 말았다. 시장의 신뢰는 땅에 떨어진 가운데 해를 넘긴 1963년 2월26일에는 사상 초유의 무기 휴장에 들어갔다. 주식시장이 다시 열린 시기는 5월8일. 73일간의 휴장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이 증권파동으로 주식시장은 더욱 불안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발행시장 육성

1963년 : 대한증권거래소(주식회사) 해체 및 한국증권거래소(비영리 특수법인) 설립
1963년 : 우리나라 최초의 전환사채 발행
1968년 :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 시행
1972년 : 동아제약 최초의 무보증 회사채 발행
1974년 : 한국증권대체결제회사(한국예탁결제원 전신) 설립
1976년 : 통일규격증권규정 신설
1979년 7월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대 개막

증권파동으로 땅에 떨어진 증권거래소의 공신력을 높이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1963년 5월 정부가 출자한 공영제 조직의 한국증권거래소로 개편하였다. 당시 자본금은 30억 원으로 그 중 정부가 68%, 증권회사가 32%를 출자하였다.

1968년에는 자본시장육성법을 제정하여 기업공개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60년대 베트남 전쟁으로 그리고 70년대에는 중동건설로 경제 발전을 거듭하던 시기다. 결과 1968년 상장기업의 수는 34개로 늘어났고, 1970년대에는 세 자리 수가 넘는 기업들이 거래소에 상장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주식 시장의 팽창은 다시 거품을 몰고 왔다. 당시 중동건설로 건설주가 증권시장을 주를 이루던 시절, 사람들은 단지 건설주라는 이유로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투기 거래의 온상이 1971년 청산거래를 폐지하고 실물거래인 보통거래제를 채택하여 투자시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9년 7월에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사옥을 신축, 이전하였다.

증권의 대중화와 코스닥 시장의 개장

1981년 외국인을 위한 외수펀드 발행
1984년코리아펀드 미국에서 발매
1985년 : 해외 전환사채 최초발행(삼성전자)
1988년 : 최초 국민주 발행(포스코)
1989년 : 국내최초 교환사채(선경) 및 해외신주인수권부사채(삼미특수강) 발행
1990년 : 삼성물산 국내최초 해외주식예탁증서(DR)발행
1993년 : 세계 최초 글로벌본드 발행(한국전력)
1994년 : 포스코, 한국전력 뉴욕증시 상장
1995년 : 주가지수 선물거래 시장개설
1996년 : 코스닥 증권시장 개장
1997년 : IMF 구제금융 신청
1998년 : 유동화채권(ABS)등 선진 금융상품 도입

80년대는 3저호황으로 수출 중심으로 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한 시절이다. 3저호황은 낮은 원화가치, 저금리, 낮은 유가로 우리나라 경기가 호재였던 것을 뜻한다. 이는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주식시장 개방

한국경제의 성장과 함께 한국 주식시장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도 늘어났다. 당시는 아직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직접 소유하지 못하던 때다. 외수펀드라는 이름으로 채권과 주식을 혼합하여 만든 포트폴리오를 통해서 주식을 매입할 수 있었다. 81년 자본자유화를 위한 국내 증시의 점진적 대외개방방안을 발표하면서 외국의 자금을 우리나라 증시에 투자 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내놓은 외국인들의 국내증권시장 간접투자방안이다.

1984년에는 자본시장 자유화조치의 일환으로 5월 14일 대우증권(주)과 Scudder, Stevens & Clark사(SSC사)가 합작으로 코리아 펀드가 만들어 진다. 이 코리아 펀드는 외국인이 살 수 있는 간접투자라는 측면에서 외수펀드와 동일하지만 성격이 조금 다르다. 외수증권은 단지 수익증권을 사는 것이고 코리아펀드는 자국의 거래시장에서 사고 팔 수 있는 별도 법인이라는 점에서 상이점을 갖고있다. 특히 외수증권의 신탁기간은 20년내지는 무기한으로 장기투자를 꾀하고 있어 급격한 자금의 유출전망은 거의 없었다.

외국인이 한국 증시에서 본격적으로 직접 주식을 사고팔기 시작한 것은 1992년 1월부터였다. 이 때부터 한국 증시의 투자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 ‘저PER(주가수익비율)주 혁명’ ‘블루칩(우량주)’ ‘기업인수합병(M&A)’ 등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용어와 투자전략을 새롭게 선보이며 증시를 이끌기 시작했다.

코스닥 시장 개설


1996년 7월 1일 증권업협회와 증권사들이 설립한 (주)코스닥증권시장에 의하여 코스닥이 개설되었다. 코스닥을 만든 것은 중소기업과 벤처기업들도 좀 더 쉽게 사업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중소기업이나 신생 벤처기업에게 증시에서 자금 조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출범 초반 코스닥 시장은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여 1년간 거래량이 증권거래소의 1~2일분에 불과했다. 여기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코스닥 시장은 더욱 침체에 빠져들며, 1998년 10월 코스닥 지수는 60.7을 기록했다.

코스닥 시장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는 1999년 IT 벤처 붐이었다. 그 당시 코스닥 시장의 대표적인 종목인 새롬기술 주가는 1999년 8월 2,575원에서 2000년 2월 308,000원까지 120배 가까이 올랐다. 다음은 1999년 11월 11,200원에서 406,500원까지 단지 2개월 만에 36배 넘게 올랐다. 이러한 거품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미국의 닷컴버블(dot-com bubble)의 붕괴와 함께 2000년 들어 꺼지게 되지만, 많은 투자자들이 코스닥에 유입되는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코스피 지수의 팽창과 주식형 펀드시장의 도래

2001년 : 한국ENC증권 장외전자거래시장 개장
2002년 : 증권거래소 주식옵션시장 및 상장지수펀드(ETF)시장 개설
2004년 : ‘간접투자자산 운용업법’ 제정 및 간접투자(펀드) 활성화
2005년 : 한국증권선물거래소(통합거래소) 출범(한국증권거래소와 한국선물거래소, 코스닥증권시장)
2007년 : 주식시가총액 1000조원 돌파, KOSPI 2,000 포인트 돌파
2008년 : 미국발 전세계 금융위기 발생
2009년 :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제정(자본시장 관련법 통합)
2010년 : 기업공개 최대규모(96개사)
2011년 : ETF시장 급팽창(세계 4위)
2012년 : 삼성전자 시가총액 200조원 돌파
2013년 : 중소기업 전용시장인 코넥스시장(Korea New Exchange) 개장
2023년 : 외국인 등록제 폐지

90년대 후반부터 불은 벤처기업 투자 바람이 불면서 코스닥 투자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언급한 바와 같이2000년 들어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세계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911테러’는 버블붕괴로 위축된 미국인들의 투자심리를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2001년 말 미국 대형 에너지회사인 엔론은 회계부정 사실이 적발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과 경기위축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그런 정세 속에서도 한국 증시는 2003년부터 대세 상승기에 접어든다. 적립식 펀드 투자 열풍이 불며 개인들의 자금이 증시에 유입됐다. 펀드는 이후 외국인들의 매도공세를 받아주는 증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주가지수는 2007년 4월 1500선을 넘어섰고, 그해 10월 2000선을 돌파했다.

2007년에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에 이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다. 이 때 대표적인 헤지펀드 운용 및 투자은행인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을 맞이한다. 이 위기가 세계적으로 자금이 ETF로 넘어오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부터 ETF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국내 ETF(상장지수펀드)시장은 지난 2002년도 시장을 개설한 후 연평균 약 40% 이상 급성장해 2011년에는 세계 4위의 시장을 차지하기도 했다.

일반 주가도 대세 상승기를 맞아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큰 시장이 되었다. 주식시장에서 삼성전자의 가치가 100조원의 평가를 받은 것이 2006년 1월 4일(102조9,600억원)이다. 이 주식이 2012년에는 200조원을 돌파한다.

<Source: 연합뉴스, 한국경제>

우리나라에 종합주가 지수가 도입된 것은 1964년의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비교해야 할 지수는 1983년 1월 4일에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 1972년에 주식발행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하자 같은 이름의 한국종합주가지수(KOSPI, Korea Composite Stock Price Index)를 처음 발표한 적이 있다. 하지만 1983년 산출방식을 기존의 다우존스식 산출방식에서 현재의 시가총액식 산출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우리나라의 증권시장이 질적 양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기존 다우존스식 산출방식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된 데다가 국제적으로도 시가총액식 지수로 전환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83년 1월 4일 100포인트를 기준으로 코스피는 힘차게 출발했다. 같은 날 종가 122.52였던 코스피는 89년 3월 31일 1000포인트, 2007년 7월 25일 2000포인트에 마감했고, 2021년 1월 6일 처음으로 장중 3000포인트를 돌파했다. 코스피 출범 38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