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년 10월 24일 목요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가 갑자기 폭락한다. 24일 장이 열리자마자 투자자들이 매물을 내놓으면서 다우는 급락하기 시작, 이날 하루에만 12% 폭락했으며 그 한달 내내 주식시장이 붕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주식이 두세배 이상 오를 정도로 치솟기만 하던 때였다. 이렇게 시작된 ‘검은 목요일’이 대공황의 신호탄이 돼 10년 동안 세계 경제를 압박했다. 한때 386.10까지 올랐던 다우존스 산업지수는 1932년 7월엔 40.56까지 대폭락했다. 거의 90% 가까이 떨어진 셈으로 100만원어치 주식을 샀던 사람의 손에 딸랑 10만원만 남겨놓았다.
이에 따라 증시에 투자됐던 자금 대부분이 증발해버리고, 보유 현금의 대부분을 주식에 투자했던 은행들은 잇따라 파산했다. 은행의 파산으로 투자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들도 줄줄이 도산했으며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1932년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대공황이 시작됐던 192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실업자도 1250만명을 넘었다. 10명당 거의 3명꼴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셈이다.
미국 경제가 휘청이자 미국에 의존하던 서유럽도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결국 세계 대공황으로 번졌다. 공황 여파로 독일은 600만명, 영국은 30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게다가 외국의 상품 수입을 금지하는 나라가 많아 세계의 교역량은 절반으로 줄었다.
진행과정
주식시장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교환방정식의 경제학자 피셔는 “산업분야에서 발명품들이 건강하게 계속 나오고 있으므로 경기가 크게 후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여전히 낙관적인 목소리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대공황은 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정권이 교체되고 민주당의 루즈벨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임을 명심하십시오.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인 이름 없는 공포, 후퇴를 전진으로 되돌리는 데 필요한 모든 노력을 마비시키는 두려움 말입니다.”
뉴딜정책을 공약으로 32대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의 연설이다. 노변 담화(fireside chat)라고 불리던루스벨트의 국민에 대한 라디오 연설은 미국 국민들에게 거의 마법과도 같은 효력을 발휘했다. 국민은 그의 호소에 열광적인 지지로 호응했고, 정부는 뉴딜정책을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뉴딜 정책은 케인즈학파의 경제 이론과 영국의 사회보장제도에 의한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 정책을 합한 것이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단순한 케인즈언 경제이론의 시험무대가 아니라, 더 평등한 사회를 위한 과감한 시도가 있었다는 말이다.
케인즈는 한 국가의 경제가 항상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사람들은 소득이 있으면 그 소득에서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는 저축을 하게 된다. 이런 저축을 기업이 모두 투자을 해야 하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일어난다. 일반적으로는 늘 불완전 고용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케인즈의 이론을 집대성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 특별한 경우의 이론이 아닌 그야말로 일반이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수행된다. 먼저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1933년 5월 농산물의 과잉생산을 규제하는 농업조정법을 시행했다. 수급을 조절해 가격 폭락을 막음으로써 농가 수익을 높이기 위함이며, 수요와 공급을 맞추려는 시도다. 대신 농사일을 하지 않는 농민에겐 정부가 보조금을 줬다. 그리고 1933년 6월엔 제조업의 과잉생산을 차단하기 위해 산업별 최대 생산량을 정한 산업부흥법을 제정했으며, 이 법에 따라 테네시강 유역 개발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도 일으켰다. 정부가 나서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늘려 멈춘 공장을 돌리려는 목적이었다.
뉴딜정책을 시행한 지 4년 만에 미국의 GNP는 대공황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60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겼다. 하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어서 1940년에는 14.6퍼센트를 기록했다.
위기의 원인
1920년쯤 세계의 공장은 산업혁명의 진원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미국은 어느새 전세계 자산의 40%를 움켜진 세계경제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미국은 얼마전까지만 실패한 유럽사람들이 모여사는 신흥국가였을 뿐이다.
그런 미국이 세계 1차 대전이 끝나자 설비 투자에 열중했다. 전기의 발명과 산업에 적용, 포드와 테일러에 의한 생산기술의 발전으로 급속한 생산성의 증가를 이루어낸 미국은 19세기 유토피아를 기다리던 유럽처럼, 물질의 풍요시대가 신천지를 열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1920년 11월 2일 피츠버그의 라디오 방송국이 세계최초로 정해진 시각에 방송을 시작하면서 대중매체로 발전하고 있었고, 1920년 대 말에는 천이백만대의 자동차가 미국을 굴러다녔다. 음악과 영화 등 대중문화 역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급격한 기술발전과 산업발달로 인해 소비가 확대되면서 새롭게 자리잡기 시작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금리를 인하하고 돈을 무한정 풀기 시작했다. 새로운 은행들이 세워졌고, 은행들은 대출을 늘렸다. 주식시장에도 마진 론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주식의 10% 가격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돈을 빌려 주식을 구입할 수 있었다.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자 증시는 가파르게 상승하였고, 소비도 증가하는 선순환 선상에 있었다.
그런 선순환은 대출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증시에 미수금잔고가 급증하자 일부 은행들이 자금회수에 나서기 시작하자 악순환으로 전환되었다. 서서히 대공황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황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주식시장의 붕괴이지만, 그 징조는 이미 실물경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시 유럽전체에 이미 생산 감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1925년 정점을 달리던 미국의 부동산 가격도 하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국은 포드와 테일러의 생산방식의 혁신으로 인해 생산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특별히 정부의 기업 지원정책에 힘입어 자동차 등 제조업 생산량은 10년간 64%나 증가했다. 그때까지 세계 경제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경제법칙을 신봉해 공장에서 마구 물건을 찍어냈다. 그러나 정작 물건을 소비해야 할 노동자들은 돈이 없었다. 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지만 개인의 소득증가는 미미했다. 살 사람은 없는데 물건을 쏟아내니 재고가 쌓였다.
실제로 미국의 GNP는 1929년 1/4분기를 최고점으로 하여 점차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자동차의 생산량의 경우 3월에 62만2천대였던 것이 9월에는 41만 6천대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주가가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실물시장의 경기하락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공황을 촉발시킨 것은 금융정책이었다. 그리고 그 현행범은 주식시장의 거품이었으며, 그 배후에는 부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범은 실물경제에서의 과잉공급이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가 신설된 것은 1914년이다. 연방준비위원회는 이 때부터 미국은 금본위제도의 원칙은 지키되 지급준비율과 금리를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물론 이처럼 통화정책이 받아들여진 것은 실물경제에 맞추어 화폐를 탄력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공개시장을 통해 통화량을 세련되게 조절할 수 있는 통화정책의 합리성과 과학성에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당시 뉴욕 지역준비은행장이었던 벤자민 스트롱은 1923년 경기후퇴를 막기위해 정부증권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말이 된다. 과거에는 통화를 공급하려면 그 근거가 되는 금이 있어야 했으나, 국채가 금을 대신하도록 허가했다. 1927년과 1928년 사이 미국의 총통화는 3.8%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미국 정부는 이제 거품을 잡기 위해 금융긴축을 실시해야 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1928년 2월부터 3.5%였던 기준금리를 갑자가 6%까지 끌어올리며 돈줄을 바짝 죄었다. 결국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투자자들은 주식을 투매해 증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결국 대공황은 과잉공급으로 인한 경기순환에서의 하락기에 금융정책이 급격히 침체기로 끌어 내리고 경기순환을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조금씩 다르다. 케인지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수요에서 소비와 투자 그리고 순수출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통화론자인 밀튼 프리드먼과 그의 동료 안나 슈워츠는 <미국 화폐사, A Monetary History of US, 1867~1960>에서 평범한 일시적 경기후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불황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대공황으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결국 경기침체로 통화량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적절하지 못한 대응이 대공황의 주요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1929년 대공황 당시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긴축정책을 포기하고 자금을 공급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연방준비위원회 이사들은 아직은 새로운 통화의 세계를 보지 못했다. 그들이 익숙한 통화의 세상은 금으로 바꾸어 주는 그런 세상이었다. 그들은 민간은행이 그렇듯이 원금의 회수에 열중했다. 의회와 당시의 대통령 후버도 재정지출을 축소하는 등 개인과 행동을 함께 했다. 어려울 때에는 정부도 국민도 모두 소비를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오래된 덕목이 작동한 것이다.
위기 극복과 그 이후
미국의 공황으로 곤두박질 쳤던 주가가 다시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24년이 걸렸다.
뉴딜정책은 항구적인 일자리를 만들지 못해 실업자가 38년에 1,000만명으로 다시 늘어났다. 이 정책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따른 전쟁 특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뉴딜정책은 실패로 기록됐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밀턴 프리드먼도 “뉴딜정책은 공황을 장기화시켰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그 진정한 실험을 끝내지 못한 것은사실이다.
하지만 이 대공황에서 사람들은 최소한 네가지 정도의 교훈을 얻어냈다. 하나는 위기에서의 리더십이다. 뉴딜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공황을 극복할 때까지 국민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루스벨트의 리더십은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대책들을 계속해서 내놓음으로써 ‘경제위기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둠으로써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졌고 결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켰다.
둘째 미완성이기는 하였지만, 경기가 어려울 때 정부의 역할에 대한 실험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통화론자들이나 케이지언 학자 모두 이 역사적 위기를 통해 경제학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금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통화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가지게 되었다. 일관성이 부족하거나 목표가 없는 통화정책은 화를 불러온다는 점도 인식되었다.
무엇보다 재정정책이 경기하강시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도 하나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경기가 급격히 하강하는 상황이라면 갈 브레이스의 말처럼 우선 배부터 구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갈 브레이스는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해야 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첫 번째 임무이다”라고 강조했다.
대공황 이전까지 다른 이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전주의 경제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완전고용이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누구도 시장이 완전고용을 자동으로 유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유효수요가 잠재적 수요에 못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 수요란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욕망은 있지만 돈이 없다면, 유효수요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구매력이 있는 유효수요만이 한 시점에서 국가의 경제활동량을 결정 짓는다. 한 사회가 완전 고용을 이루려면 모든 소득이 소비되거나 투자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돈이 국민소득을 만드는 순환고리에서 돌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순환과정에서 도는 돈은 민간부분에서 소비한 돈과 기업이 투자한 돈이다. 즉 가계부분의 저축과 기업부분에서 투자없이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돈은 한 동안 국민소득 순환에서 빠져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돈은 경제활동에서 쉬고 있는 돈임으로 경제성장에 도움이 안되는 돈이다.
돈이 돌아야 한다는 말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셈이다.
따라서 한 국가의 경제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가계부문의 소비와 기업부문의 투자이며, 이를 합하여 유효수요가 된다. 유효수요가 작아지면 국가의 경제활동 수준은 떨어지고, 유효수요가 늘어나면 한 국가의 경제활동 수준은 증대하게 된다.
여기에 재정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가정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많이 할 경우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 기업이 생산규모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때 정부가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을 이용해 유효수요를 늘린다면 경기하강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주장이 아주 단순하고 매우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 대가가우리가 경기변동에서 논의한 구축효과다.
하지만 2008년 시작된 경제위기에 누구도 구축효과 때문에 정부의 재정지출을 반대하기는 어렵다. 단 경기가 어느정도 상승의 모멘텀을 가지기 시작하면, 구축효과에 대한 가능성을 살펴야 하며 다시 경제성장의 힘을 시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째 부의 불평등과 직업의 안정성에 관한 문제다. 뉴딜정책하면 케인즈 학파의 경제이론을 떠올리지만, 사실 뉴딜정책의 핵심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국가주도 복지정책이 있었다. 그래서 2008년 노벨 경제학 수장자 폴 크루그먼은 이 시기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압축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상당부분 축소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다. 크루그먼은 뉴딜정책 이전의 미국은 명목상 민주주의였지만 부와 권력에 있어 불평등이 만연했고 대다수 국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에는 실패했던 시절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 미국이 뉴딜정책에 의해 소득격차, 부유층과 노동자계급의 차이, 노동자 사이의 임금차도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은 이 시대야말로 상대적으로 중산층이 많고 경제적 평등이 실현된 이상적인 사회였다고 강조한다.
뉴딜정책을 통해 사회보장법을 만들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판을 만들었으며, 기업과 부자에 대한 세금을 올려 미국 역사상 가장 평등한 번영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5년 루즈벨트는 사회보장법을 통해 노동자의 단결권과 임금교섭권을 보장하고, 최저임금과 최고 노동시간을 명시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사상 최초의 조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수정자본주의라 불렀다. 결국 국가 역할 확대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 그리고 사회보장을 통해 기존의 자본주의 정책을 조금 바꾼 것이 수정자본주의다.
그런 미국사회가 1970년에 들어서면서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졌다. 크루그먼은 그 증거로 부자들에 대한 소득세 하락과 임금차이를 제시한다. 예들 들어 소득에 대한 최고한계세율은 1970년대 초 70%에서 35%로 줄어들었고, 1930년대 CEO와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봉은 40배 차이가 났는데, 2000년대 초에는 367배가 넘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부가 넘쳐나지만, 그 혜택은 극소수가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불평등이 축적되다 보면 임계점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순간을 향해 달려가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