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자본시장 개방과 외환위기

아시아의 자본시장 개방과 외환위기

한국이 외환위기를 막기 위해 IMF행을 발표하기 바로 전날인 1997년 11월 2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개장 30분 만에 전날보다 10퍼센트 떨어진 달러당 1,139원을 기록했다. 이날부터 하루 변동폭이 종전의 2.25퍼센트에서 10퍼센트로 늘어났으니, 시장 문이 열리자마자 최대 한계까지 떨어진 것이다. 외환거래는 이내 중단됐다.

루빈 당시 미국 재무장관은 11월 20일 오전에 “한국이 현재의 위기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융체제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히 취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쉽게 말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IMF에 손을 벌리라는 경고성 메시지였다.

진행과정

한국의 위기는 1997년 1월 23일 재계 자산순위 14위의 한보철강이 부도처리되면서, 외환위기 첫 신호탄이 올랐다. 그 1997년 한해 동안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뉴코아 등 재벌 대기업들이 도산하였으며,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업체의 부도로 한국경제는 휘청거렸다. 이외에도 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법정관리 체제로 넘어 가게 되었다.

10월경 IMF 조사단이 한국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직후 “한국은 장기적으로 구조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상황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계속해서 하향조정하였다. 연이어 주식시장은 폭락하고 환율은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1997년 11월 21일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서 IMF 구제금융을 수용한다고 발표하였다.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이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한국의 임창렬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가 오후 7시40분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의 경제가 IMF의 관리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의 재경원이 IMF와의 조건에 관한 협상이 막 시작되던 11월 24일의 금융시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이 날의 주식시장은 말 그대로 ‘한국판 블랙 먼데이’였다. KOSPI는 지난 주말보다 7.2퍼센트나 폭락한 450.64로 마감했다. 금융시장에서 금리는 폭등하고, 외환시장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2월 23일에는 1달러가 2,000원선으로 폭등해, 연초 800원대에 비해 3배 이상 오르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부도나 화의신청을 통해 사라졌다. 특히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금융을 이용한 기업확장으로 인해 가진 부채가 환율 하락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65조가 되었고 IMF 구제금융 사건 이후 정부의 엄청난 국고 지출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가정이 붕괴되고, 재산을 잃고 길거리 노숙자로 내몰렸다.

은행의 대규모 인수 합병이 이루어 졌으며 이러한 도중 많은 기업들이 외국 기업에 헐값에 매각되었다. IMF의 원조 조건에 따라 고용시장에 자유경쟁체제가 도입되어, 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었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고 대신 평생직업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급여에서도 호봉 개념 연공서열 대신 연봉제로 바뀌었고, 또한 정리해고가 자유로워져 정규직 근로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근로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IMF 위기를 통해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국민이 일치단결하면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업은 성장위주의 경영에서 수익위주의 경영으로 전환하게 됨으로써 건전성과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을 보내고 2000년 12월 4일 국제통화기금의 차관을 모두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정부가 공식 발표함으로써 IMF가 한국경제를 통치하던 시대를 마감하였다.  

위기의 원인

“한국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2008년 12월 4일 KBS가 자신들이 입수한 미국정부의 내부문서에 근거해 보도한 내용이다.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은 1997년 초부터 한보사태 등 한국의 경제 동향을 유심히 관찰해 왔으며, 주한 미 대사관은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97년 12월부터 아예 ‘IMF 데일리’라는 제목의 일일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보냈다. 그 전문에는 “미국의 최우선 목표는 IMF와 미국에 대한 의무를 완전히 준수하도록 확실하게 압박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기도 하다.

아시아 외환위기는 태국에서 시작되었다. 경상수지 적자가 큰 데도 미 달러화에 사실상 고정된 가치를 유지하고 있던 태국의 바트화가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바트화가 절하될 것이라고 예상한 헤지펀드들의 공략이 시작됬고, 급기야 `바트화의 대폭 절하`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영국의 파운드화가 소로스의 헤지펀드에 당한 바로 그 방법이다.

태국에서 시작된 이런 외환위기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을 거쳐 홍콩, 한국 등으로 확산되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이 퀀텀펀드 운용자인 조지 소로스를 악당 투기꾼으로 지목하고 헤지펀드를 동남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적한 것도 이 때다.

우리나라 외환위기도 헤지펀드 개입의 산물이라고 보는 의견은 아시아권 전체가 헤지펀드 공략대상이었다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나라를 들고 나는 자본의 규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서 위기로 확대됐고, 이 과정에 헤지펀드가 관여하면서 문제가 더 크고 빠르게 확대되었다. 아시아의 외환위기의 기본적인 원인이은 이전까지 닺혀있던 각국의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규모에 비해 너무 큰 자금의 유입이 자유롭게 된데에 있었다.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은 <한국의 외환위기 발생 극복 그 이후>라는 저서에 “자금의 조달과 운영이 일치하지 않는 위험한 외채구조를 갖고 있는 가운데 1997년 10월 하순 이후 해외자본들이 본격적으로 단기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97년 해외자본이 회수한 단기자금은 약 300억달러로 우리 금융기관들은 이를 상환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정부는 1997년 9월 이후 계속된 원화의 하락에 대응하여 원화가치를 지키기 위해 환율 방어를 시작하였다. 이런 소모전을 통해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환율개입을 통해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지키려했다는 지적이 있듯이, 환율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언급했듯이 이런 국가의 목표는 바로 공격 대상으로서의 노출을 의미한다. 거기다 만기가 다가오는 외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흑자를 내고 있지만 부채가 많은 기업이 한번에 자금을 상환하게 되면 부도에 직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외환위기의 결정적인 원인은 결국은 무리하게 가져다 쓴 부채라는 덫에 있었다.

1996 년까지 24개의 투자금융회사가 종합금융회사로 전환되었고 이후 30개로 늘어나서 해외업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자금원이 주로 외국의 단기 부채였다. 금융회사들은 이 외채로 기업들의 어음을 교환해 주었다. 과도한 부채를 가져다 쓴 기업이 부도를 일으키게 되자 이 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특히 한보와 기아가 12조원에 달하는 부도를 내자, 위기의 순간이 빠르게 다가왔다.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이 엄청난 자금을 대출해 준 것은 단순히 은행의 자율적 결정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비를 통한 정경유착이 만연하던 시절이다. 미국의 당시 재무부장관인 루빈은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에서 “한국 금융에서 문제가 되는 한 가지 관행은 ‘관치 금융’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통해 정부 관리들은 누구에게 융자해줄 것인지 은행들에게 지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기강이 별로 없는 곳이 되었고, 기업에 호의를 베푸는 은행들은 도산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를 받았으며, 사실상 금융에 대한 견제라고는 없는 상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정치권과 밀착된 기업들에 대한 특혜 금융대출이 과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98년 6월 29일 대동, 동남, 동화, 경기, 충청은행등 5개은행이 퇴출되어,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으로 넘어갔다. 이들 역시 관치 금융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 은행과 거래하던 기업들도 연달아 도산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더 문제는 IMF와 협상이 끝나고부터이다. 당시 은행은 IMF권고대로 BIS 비율을 8%에 맞추기 위해 신규대출을 생각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은행의 수입원이 사라지니 은행의 수익성은 떨어졌고, 시중금리는 폭등하였다. IMF의 자금을 빌려 오는데 따른 의무사항이기는 했지만, 정부도 20%를 넘는 살인적인 초고금리로 대처하였다. 불황국면에서 경기진작을 위해 저금리정책을 사용해야 함에도, 정부는 달러를 끌어 들여야 한다는 이유로 고금리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건전한 기업마저 자금난에 허덕이며 도산하였고 결국 외국자본들의 먹이가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맞아 각 나라가 경쟁적으로 정책금리를 인하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한국정부의 정책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금융위기 당시 대부분의 나라가 유동성을 늘리기 위해 통화를 늘리고 금리를 하향조정해왔던 방식의 반대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채시장도 문을 닫아 버리고 금융권이 담보로 잡았던 부동산과 자금이 어려운 기업이 매물로 쏟아져 나왔지만 팔리지 않았다. 외국 자본의 먹이감이 점차 더 늘어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한국정부는 미국의 투자은행 JP모건, 메를린치, 모건 스텐리 등에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털어주고 당시 성업공사를 통해 싸게 인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높은 달러의 가치에다가 반토막 난 한국의 자산을 인수함으로써 그야말로 반에 반토막의 가격으로 자산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위기극복과 그 이후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98년 한해만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보였을 뿐 전형적인 V자형 경기회복을 보이면서 3년만에 IMF의 통치에서 벋어났다.

때 맞춘 IT 라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정부의 정책도 경제회복에 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부 쪽에서는 외환위기의 근본적인 문제가 대기업 육성정책과 그들의 시장 독점 때문이었다는 반성이 이루어졌으며, 곧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재벌 개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벤처기업과 중소기업 육성정책과 코스닥 시장의 활성화는 수많은 벤처기업들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경제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 기업의 경쟁력이 아닌 관치금융의 자금지원으로 유지되던 많은 기업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기업의 경영목표는 시장점유율과 성장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를 경험하며, 외형위주 매출위주의 성장에서 수익 중심의 경영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사실 외환위기 전만해도 은행에서 누가 더 많은 돈을 빌려내는 것이 경쟁력이었다. 그리고 대마불사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의 크기가 기업의 건전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 기업의 건전성은 진정한 재무구조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기술경쟁력이 진정한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것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정책으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신동력에 에너지를 불어넣기 위한 벤처기업 육성정책과 갈 곳을 찾지 못하던 유동자금이 만나 IT버블을 만들어 냈다. 경기 부양을 위한 건설 지원과 카드 사용을 통한 소비촉진정책은 카드빚에 의한 신용불량자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결국 2003년 카드사태를 거치며 버블 붕괴의 충격을 실감했어야 했다.

그것도 끝이 아니었다. 거품의 붕괴 이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내수부진이 이어졌다. 그런 과정에서도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였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001년부터 8차례에 걸쳐 2.25%포인트 인하하며, 2004년말에는 당시로서 사상 최저치인 3.25%까지 내린데다가 달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시중의 유동성은 계속해서 불어났다.

개인들은 빚을 내어 버블을 팽창시키기 시작했다. 가계 대출은 1999년까지 192조원 정도였으나, 그 후매년 30% 가까운 중가를 보이며 2008년에는 급기야 648조원까지 불어났다. 이런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참여정부가 쏟아낸 각종 부동산 규제 정책에도 부동산 거품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버블세븐’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것도 이 때다.